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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케냐(Kenya)_투르카나(Turkana)
    기행/해외(아프리카) 2021. 7. 2. 20:16

    2019년 첫 출장은 평소에 비해 다소 늦은 5월에 찾아왔다. 오랜만에 가서 그런지 걱정이 되면서도 기대가 컸다. 겸허하고 담대한 마음을 다짐하며 동생의 배웅으로 시작된 여정...*

    Thanks Bro!

    이번 출장국인 케냐(Kenya)는 어느새 네 번째다. 아프리카 출장 중 가장 많이 온 국가다. 주로 선발대로 혼자 왔기에 공항 밖 아프리카 대륙을 오롯이 홀로 마주하곤 한다. 도착했다는 안도와 또 다른 긴장이 교차되는 그 순간이 참 묘하다.

    Mambo Kenya?

    네 번의 케냐 방문 중 세 번은 투르카나(Turkana) 출장이었다. 한국 사무소에서도 가본 사람이 드문 지역인데 어쩌다 보니 점점 연이 깊어진다. 2017년부터 삼 년간 매해 찾는 혼자만의 진기록도 세웠다. 나이로비에서 하루 묵고 다음 날 새벽 윌슨 공항으로 향했다. 

    아이스라떼와 소고기 파이로 기력을 보충했다. 공항 내 TV에서 로보카 폴리가 나와 신기했다.

    작은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프로펠러가 노출된 형태의 쌍발 소형 비행기를 탔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아프리카 국내선에선 가장 흔한 기종인 것 같다.

    쌍발기 특유의 엔진음을 들으며 내려다보는 케냐 땅이 나름 운치 있다.

    1시간 30분 정도 비행한 후에 투르카나의 관문 중 하나인 로드워(Lodwar)에 도착했다.

    익숙한 풍경 속 흐르는 강물이 낯설고 반갑다.

    도시 인근으로 중국 자본과 인력이 대규모 토목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꽤나 긴 도로가 이미 포장되어 신기했다.

    이내 찾아온 익숙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에밀레종마냥 창을 치며 졸다 보니 어느새 블랙골드호텔이 있는 로키차(Lokichar)에 도착했다.

    특급 호텔 부럽지 않은 익숙한 아늑함이 나를 반긴다.

    반가운 얼굴들과의 해후를 뒤로하고 곧바로 바쁜 일정이 시작됐다. 달라진 듯 여전한 많은 것들을 마주했다. 하루 종일 많은 얼굴들을 마주하며 무심하게 스쳐보내는 내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아프곤 했다. 그 변변치 못한 통증이야말로 최소한의 양심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일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지극히 인간적인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대부분의 삶 앞에 나를 잠식하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곤 했다. 개인적인 버거움이 어떤 삶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바뀔 때면 한없이... 한없이 겸허해졌다. 나의 가난한 마음을 채워준 누군가에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곤 품 속의 얄팍한 사탕 몇 개가 전부일 때가 많았다.

    투르카나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옷을 뜯고 밑창을 뚫는 억센 가시다.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푸른 싹이 함께 돋아 있었지만 여전히 예리했다. 하지만 투르카나의 사람들은 못지않게 굳세다. 무력한 상황에도 무기력해지지 않는 인간의 강인함을 그들에 비춰 많이 배운다.

    업무 특성상 의료기관들을 많이 찾는다. 어느 날 열심히 일정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현지 직원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로페롯 보건소에서 온 연락이었다. 차 지나가는 거 봤다고, 응급환자가 있는데 이송해 줄 수 있느냐는 긴급 요청에 급하게 차를 돌려 가까운 병원에 모셔드리고 왔다. NGO가 현지에서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역할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다.

    세 번째로 찾은 이 땅에서 여전히 뜨겁게 살아내던 수많은 삶 못지않게 위로가 된 건 무심한 풍경들이었다. 압도적인 자연에 경탄하는 순간이 잦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각이 오히려 힘이 되곤 했다.

    낯익은 풍경들 속에서 때로 내가 지난 시간 만났던 얼굴들을 우연히 다시 마주하곤 했다. 반가움과 함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불합리한 세상을 알면서도 홀로 누려온 시간이 뒤늦게 먹먹했다. 작년 출장 후 후속 지원 중인 아동을 만났을 때는 너무 오랜만에 찾은 듯한 미안함과 잘 자란 모습에 대한 감사를 동시에 느꼈다. 

    여러 번 찾았고 워낙 척박한 곳이라 그런지 동물들도 자꾸 눈에 밟혔다. 당나귀, 염소, 낙타를 비롯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가 감히 안타깝고 대견했다. 사실 나보다 훨씬 강하고 어떤 면에선 나보다 더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마음이 문득 들곤 했다.

    낯선 풍토에서 무리하다 보면 누적된 피로로 목이 퉁퉁 붓고 구내염으로 입속이 다 해지곤 한다. 한껏 지치다가도 지침조차 사치인 많은 삶 앞에 정신을 번뜩 차리곤 했다. 현지 직원, 한국 출장자, 현지인의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내가 속한 기관의 이해관계와 개인의 관점과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자괴감인 것 같다. 하지만 그 감정 이상으로 행복했다. 어쩌면 행복은 감정의 총량을 넘어서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긴장과 부담으로 해가 뜨기 전 새벽 4시쯤이면 눈이 떠졌다.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인데도 출장만 오면 생각지 못한 상황과 얼굴들을 꿈에서 만나곤 한다. 덕분에 아프리카의 새벽과 동이 트기 전 내 마음에 침잠할 수 있었다.

    한정된 일정으로 거의 매일 달님과 함께했다. 출장 일정상 달이 차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다. 일정 말미에 무례와 무능 혹은 무리 속에 고독으로 지쳤던 하루가 있었다. 처음 왔을 땐 가늘디 가늘었던 달이 어느새 꽉 차 어두운 밤을 환히 밝혀줬다. 어느새 보름달이 되어 낮고 크게 빛나는 모습에 새삼 감동했다. 달빛에도 온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일정 중에 우연히 사업장을 거칠 때도 있었다. 수도 시설에서 맛있게 물을 들이켜는 낙타들을 보며 스와힐리어로 물은 생명이라는 말인 'Maji ni Uhai'라는 말이 절로 생각났다.

    이동하다가 현지 지역 본부장인 조셉이 주민 대상으로 교육하는 곳에 들르기도 했다. 나를 '박'이라고 소개해 줘서 주민들이 '박, 박!'해주시는데 되게 기분이 묘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아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번 출장을 버티게 한 것들은 사실 내가 만난 모든 것들이었다. 특히 멋진 동료들 덕분에 버텨낸 시간이 참 많았다. 모세는 투르카나에서 한 3번의 출장을 모두 함께한 동료다. 어느덧 서로 신뢰가 쌓여 든든했다. 특히 중간에 내가 몸이 너무 안 좋아 혹시 말라리아 아니냐며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 줘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뭔가 에드워드 호퍼가 생각난다...*

    콜린스는 이번 출장에 처음으로 함께한 동료였다. 내내 나랑 부딪혔다. 현지 직원들도 우리 사이의 긴장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고민하다 업무상 필요하다고 탐내던 usb에 한글로 콜린스라고 적어두고 일부러 다른 직원들이 다 있을 때 건넸다. 처음엔 개인 물품이라 빌려주는 거라고 영어로 말하고, 한국인 동료분께 한글로 뭐라고 적혀있는지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불린 뒤 바로 이어 '빌려줄게... 영원히...*'라고 말했더니 다른 직원들이 더 좋아했다. ㅋㅋ 콜린스의 세상 밝은 미소와 모세스와의 하이파이브가 짜릿했다. 내가 옳고 그가 틀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옳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지켜야 하는 내규가 있었다.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갈등을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보와 용서라는 걸 한 번 더 깨달았다.

    나이가 절대적인 위계의 기준이 되진 않지만 같은 또래의 동료들은 어쩔 수 없는 친근감을 준다. 동갑이었던 데이빗과 비슷한 나이였던 프란시스는 일도 정말 열심히, '잘' 해주어 고맙고 또 고마웠다. 틈틈이 공감대에 기반해 편한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어 더 좋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한 드라이버 와뇨니 아저씨도 묵묵히 역할을 감내해 주셔 감사했다. 때로 스피드를 너무 높이셔 무섭기도 했지만 모세와 함께 우갈리 송 떼창도 하고 좋은 조합이었다...*

    똘레는 나이로비에서 여기까지 동행해 줬다. 홀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내가 먼 길을 무사히 오고,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모두 드러나지 않는 누군가의 헌신 덕이었다.

    1년에 한 번씩 오는 실무자인 나를 기억하고 환대해 주는 지역본부장님 조셉도 늘 너른 품으로 프로젝트를 지지해 주어 감사했다. 

    점점 투르카나인이 되어가는 미스터 박도 반가웠다...*

    Ejoka?

    병원, 호텔 등 수많은 곳의 담당자들의 협력과 노력에도 많은 빚을 졌다.

    함께했던 한국 스태프들도 정말 감사했다. 특히 같은 기관 동역자들은 늘 내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함께한 분들 모두 최선의 헌신과 각자의 방법으로 나를 배려해 주었고 덕분에 크나큰 보탬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안재민 감독님이 다큐멘터리에 대해 해주신 말씀도 기억에 오래 남았다. 현장에서 쌓고 찾은 이야기들을 짧게라도 영상으로 남겨두어 아카이빙하고 구체적으로 늘려가라는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셨다. 이야기를 들으며 예전에는 봉사로 다양한 삶과 동행했다면 지금은 일과 출장을 통해 그 발걸음을 이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료들의 멋짐을 간직하고 싶어 틈날 때마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일정을 마친 뒤 프란시스, 데이빗, 모세가 나란히 고마웠고 조심히 가라는 문자를 남겨줘 괜히 찡하고 감동스러웠다. 지지고 볶으며 상식 이상의 헌신과 배려로 기적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여담으로 이번 출장의 식사는 아침, 점심, 저녁이 나름의 균형과 변화를 갖춰 준비되었다. 아침에는 주로 만다지와 달걀, 작은 과일이 준비되었다. 점심에는 감자를 중심으로 도시락을 싸 갔다. 저녁은 상대적으로 잘 준비되어 밥+우갈리+야채볶음+고기 식으로 먹었다. 개인적으로 케냐 차쿨라 타무 사나!(케냐 음식 아주 맛있어요!)

    일정을 다 마친 뒤에는 현지 직원들이 먹고 싶어 하던 염소고기 야마초마(숯불구이)를 먹었다. 염소한테 미안하면서도 잘 먹는 나를 보며 동료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더 맛있게 먹었다.

    이런저런 생각과 시간을 거쳐 출장을 무사히 마쳤다. 투르카나를 찾아 여느 때와 같이 최선을 다했고 버거웠다. 같은 곳을 3년 연속으로 찾으며 애착이 깊어졌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최소한의 권리와 행복을 최대한 누리길 기원하며 눅진 마음과 무거운 몸을 간신히 침대에 누이곤 했다. 동시에 여느 때완 달리 내 나름의 관점과 방식, 고민이 깊어짐을 느꼈다. 

    Turkana forever!

    '나 걸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던 맑은 목소리를 간직한다. 그 아이가 언젠가 꼭 걸을 수 있기를 믿고 기도하며, 동시에 나에게 주어질 걸음을 다짐한다. 척박한 토양에 깊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투르카나인의 긍지와 힘을 가득 담아 돌아간다. 분명 금방 잊히겠지만 이 땅과 사람들과 함께한 순간순간이 영원히 간직될 걸 안다. 사랑과 감사를 담아 홀로 삼키듯 외쳐본다. Ejok n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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