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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역 예술영화관 아트나인에서 한공주를 보다 (+잇나인에서 화덕피자)
    문화생활/영화 2014. 5. 31. 23:12

    빠르게 찾아온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오월의 어느 멋진 날. 오랜만에 이수 아트나인에 다녀왔다. 이수 아트나인은 일반 영화관과 다른 예술영화관을 표방하고 있다. 국내 대형 배급사들에서 다루지 않는 세계 각국의 명품 예술영화들을 상영하겠다는 것인데 내가 갔을 때도 다른 영화관들에선 보기 힘든 한공주, 피부색깔=꿀색 등이 절찬리에 상영 중이었다. 



    사실 이러한 예술영화관 혹은 독립영화관을 표방하는 곳은 아트나인 외에도 아트하우스 모모, 인디스페이스 등 꽤 많은 곳이 있다. 아트나인이 인상 깊었던 점은 영화관 자체가 예술적이었다는 것이다. 아트나인은 서울 시가지인 이수역의 빌딩 12층에 위치했다는 점을 살려 영화관 전체를 마치 스카이라운지처럼 꾸몄다. 



    또 영화관 외의 공간을 잇나인이란 이름의 식당 겸 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판매하는 음료 및 음식의 가격이 다소 비쌌지만 영화를 보기 전후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구조여서 좋았다. 그리고 지금은 시네마토그래프의 자리를 디지털 4K 영사기가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에 뤼미에르 형제도 그랑 카페라는 ‘카페’에서 영화를 최초로 영사했었다. 카페라는 매개를 통해 새삼 영화의 형식이 변할지언정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수에서 파리를 떠올릴 때 영화관 곳곳엔 장 뤽 고다르 기획전과 레아 세이두 기획전을 연다는 홍보물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아트나인은 시네프랑스란 이름의 프랑스 영화 관련 기획전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고 한다.)



    아트나인은 화장실도 아...트...*



    거기에 가장 중요한 영화 상영관 안의 시설도 EV사의 파워앰프와 4K급의 영사기를 사용하고 있어 다른 영화관들에 비해 더 훌륭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한다. 그런 환경 덕이었을까 영화 ‘한공주’를 정말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내가 이곳에서 봤던 영화 ‘한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한공주’는 2004년에 실제로 밀양에서 있었던 끔찍한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에 대해 논하기 전에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들이 이렇게 조용했던 영화는 처음이었다. 물론 아트나인의 상영관 크기가 작고 함께 본 사람 수도 적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영화가 끝나고 이상하리만큼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나는 어렴풋이 영화를 함께 본 사람들 모두 화가 났지만 우리 모두 화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우리나라엔 화를 내야 할 일들이 참 많았다. 가장 최근에 있던 세월호 사건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의외로 화를 잘 참아낸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이 영화와 저 사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 주저하게 된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하지만 정말 이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직도 공주의 그 아픈 말이 귀를 맴돈다. 영화는 실제로 있던 사건을 다룬 만큼 실제 사건의 디테일들을 군데군데 잘 숨겨놓았다. 도입부에 스치듯이 지나가는 경찰관의 “밀양의 물을 다 흐려놓았다.”라는 발언부터 아버지의 합의 종용 그리고 가해 학부모들의 지난한 추적까지 다 실제로 있던 일들이다. 너무도 몰상식한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나를 비롯하여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속된 말로 정말 뚜껑이 열린다.


    하지만 영화는 절제된 표현으로 ‘이 영화’ 자체에 관객들이 보다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가령 가장 많이 쓰이는 구도 중 하나가 공주의 뒷모습이다. 트래킹과 핸드 헬드를 이용해 마치 관객이 그녀 뒤에서 같이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보통 이때 Z축 피사계심도를 이용하여 공주의 뒷모습만 남기고 배경을 다 날려 버리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녀를 관찰하는 듯한 기분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다른 많은 장면에서도 피사계심도를 이용해 공주에 집중하고 다른 인물이나 배경들을 흐리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전경, 중경, 후경의 초점을 왕래하는 공주를 통해 이렇게나마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았던 공주에 집중할 수 있어 다행스럽지만 또 한편으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때나 지금이나 남의 아픔에 대해 지나치게 관조적이고 관대한 것은 아닌지 가슴이 저릿했다. 또 굳이 나누자면 한공주는 로 콘셉트 영화이기 때문에 이런 기법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화의 메인 '캐릭터'인 한공주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힘이 있어야 해! 돈 없고 빽 없는 놈은…”라며 합의를 종용하는 아빠. “공주야, 네가 잘못한 게 없는 건 아는데, 근데 그게 안 그렇다.”는 선생님. “엄마도 너 보고 싶어, 그렇긴 한데, 내가 너무 힘들어.”라며 공주가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엄마. 학교까지 찾아오는 가해자들의 부모. 누구에게나 삶은 만만치 않고 지난한 것이지만 공주는 정말 얼마나 외로웠을까? 문득 천상병 시인의 ‘거짓말처럼 나는 혼자였다. 사람들은 결코 나와 섞여지지 않았다.’ 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고장난 선풍기, 깜빡이는 형광등 그리고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는 캐리어. 많은 것들이 그때그때 공주의 상황을 대변해 준다. 그러나 공주가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은 드물다. 다만 그녀가 부르는 노래만이, 힘겹게 배워가는 수영만이 삶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짐작게 할 뿐이다.


    담담하게 풀어갔지만 덤덤할 수 없던 영화. 그럼에도 나는 결말이 정말 소름 돋게 좋았다. 해석하기에 따라 공주가 인생을 포기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공주가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아서 감사했다. 그리고 그래서 한편으론 가슴과 머리가 더 무거워졌다. 공주도 나도 아직 살아 있기에. 그리고 공주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한공주 (2014)

    Han Gong-ju 
    9
    감독
    이수진
    출연
    천우희, 정인선, 김소영, 이영란, 권범택
    정보
    드라마 | 한국 | 112 분 | 2014-04-17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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