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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파정 서울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 -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문화생활/전시 2023. 1. 12. 21:23

    정말 집 밖으로 한 발도 떼기 싫은 날이었지만 참석해야 할 결혼식이 있어 상경했다. 꼭 보고 싶던 전시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해 서울까지 온 김에 없는 기운을 짜내 다녀왔다. '두려움일까 사랑일까'라는 제목으로 열린 석파정 서울미술관의 10주년 기념전이었다. 이름만 보면 왠지 공립 미술관 같지만 2012년 유니온약품 안병광 회장이 설립한 사립이다. 전시 마지막 주말이라 그런지 대기하는 줄이 있었지만 10분 좀 넘게 기다려 입장할 수 있었다.

    11월이 될 때까지 한 해가 참 마음 같지 않았다. 사랑할 결심을 했지만 내 삶이 주로 그래왔듯 또 엇갈리고, 생각지도 못한 시련들이 이어져 다시 두려움이 커졌다. '두려움'과 '사랑'을 양가감정으로 보고, 시대의 고난과 개인적인 어려움을 딛고 각자의 예술 세계로 승화한 31명의 예술 작가를 만나볼 수 있는 이 전시는 일종의 순례처럼 느껴졌다.  

    들어서자마자 애정하고 반가운 김환기, 박수근 선생부터 도상봉, 김기창 선생 등 화폭은 조금 낯설지만 익숙한 감동을 주는 여러 작가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과 박완서 작가의 글을 보며 지난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서 봤던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을 홀로 떠올리기도 했다.

    기독교 신앙에 한국적인 그림체를 더한 김기창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은 무려 30점에 달했다. 한국전쟁 중에 그려졌다는 사실이 작품에 의미를 더하는 듯하다.

    천경자, 임직순, 유영국 화백을 비롯해 자기만의 색과 선을 그리기 위해 삶을 쏟아부은 혹은 부어진 거장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니 왠지 조금 겸허해졌다. 누군가의 삶을 간접적으로 가늠한다는 게 어쩌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혹은 전할 수밖에 없어서 많은 걸작들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타인의 길을 좇다 보면 어쩐지 한 치 앞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이중섭 화백의 '황소'다. 친애하는 아고리 상, ㅈㅜㅇㅅㅓㅂ 님의 가장 유명한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눈을 마주친 황소는 왠지 조금 지쳐 보였지만 동시에 고유한 순수와 호기심을 간직하고 지켜낸 듯했다. 그 눈빛에서 화가의 영혼을 엿볼 수 있었다.

    김환기 화백의 시정신과 운율이 느껴지는 여러 작품도 볼 수 있었다. 그가 그림에 담은 시어들은 우주를 헤엄치는 듯 자유롭고 아름답다. 왠지 모를 따스함을 느끼며, 그가 남긴 문장들과 작품과 맞닿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에서도 잠깐의 안식을 누렸다.

    김흥수, 최영림, 문학진, 이응노, 이왈종 화백을 비롯해 여러 사람의 관점과 표현을 둘러보며 참 알찬 전시라는 걸 새삼 느꼈다.

    이전까지 본 건 제1전시장이고 3층에 제2전시장도 있다. 다르게 새로운 여러 작품을 넉넉하게 만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한 사람의 컬렉션이라니 더 대단하다. 단순히 안병광 컬렉션을 소유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렇게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너르게 조성한 세심한 미술관의 존재가 감사할 따름이다.

    어느덧 전시의 말미다. 김환기 화백을 필두로 도상봉,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유영국, 이우환 등 익숙한 이름부터 새로 알게 된 작가들까지 정말 알찬 전시였다. 특히 '수집가'의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어 더 기억에 남는다.

    사실 괜스레 지치는 나날 속에 정서적인 가뭄을 겪고 있었다. 애매하게 섬세한 나도 세상살이가 때로 이렇게 시끄러운데 차원이 다른 눈과 귀를 지닌 당신들은 어떻게 이런 예술 세계를 구축했을까. 촉촉한 경외와 감동이 메마른 가슴에 가을비 같았다. 잠시 표정과 열정을 잃고 흩어진 삶의 갈피를 쉬이 잡지 못하던 차에 마주한 걸작들이 어린 고뇌를 겸허하게 한다. 사랑은 두려움을 딛게 한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겨 본다.

    외부에는 조선 말기 건축되어 고종이 별장으로 이용했다는 석파정이 있다. 도심 속 고즈넉한 정원 같았는데 다음 일정으로 아쉽지만 스치듯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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