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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_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문화생활/전시 2022. 1. 29. 00:25

    개인적으로 박수근 선생님의 그림에 담긴 따뜻함을 참 좋아한다. 막연하게 언젠가 양구에 위치한 박수근미술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감사하게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삶과 작품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 열렸다. 무려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공동 주최로 보다 풍성한 전시가 기대됐다. 설레는 마음으로 덕수궁을 찾았다. 한동안 코로나19 방역 지침으로 시간별로 관람인원이 제한됐었는데 단계적 일상회복 시행에 따라 온라인 사전예약만 하면 입장이 가능했다. 오랜만에 대기 줄에 서서 10분 정도 기다려 입장했다.

    내가 미처 몰라봤을 가능성이 높지만, 작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기획 전시가 너무 좋다. 특히 문학과 미술을 맞닿은 기획이 소중하다. 이번 전시도 이름부터 박경리 선생님의 글, '나목'과 박수근 선생님의 그림 그리고 삶이 맞물려 큰 울림을 자아낸다.

    참고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연계 영상과 큐레이터 전시투어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해 전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늘 감사한 마음이다. 

    이번 전시는 미석 박수근이 19세에 그렸던 수채화부터 51세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린 유화까지 전 생애를 망라한다.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를 비롯해 총 174점에 작품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크게 4개의 주제로 진행되는데 그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존경스러운 한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1. 밀레를 사랑한 소년 

    박수근 화백은 유년기에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별도의 미술교육을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랑수아 밀레를 롤 모델로 삼으며 독학으로 꿈을 키웠다. 그렇게 18살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기까지 얼마나 고단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환경이나 시련을 탓하지 않고 끝끝내 지켜낸 진주 같은 꿈이 얼마나 눈물 나게 아름다운지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박수근 화백의 아내였던 김복순 여사가 쓴 전기도 전시되어 있었다. 육필에 부부간의 사랑이 묻어나는 것 같아 뭉클했다.

    여느 거장이 그렇듯 그의 예술세계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었다. 부단한 노력을 통해 우리 눈에 익은 그만의 화풍을 찾아가는 과정이 경이로웠다.

     

    2. 미군과 전람회 

    박수근은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일명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뒤 여러 전람회에 참여하며 인지도를 높이고 미술계에서 점차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컸던 서울에서 그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성실한 예술가는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미군 PX에서 초상화가로 일했다. 채 오지 않은 봄에도 그가 지켜낸 전업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에 숭고함이 느껴졌다. 그 덕에 후세의 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고 있었다. 작품이 주는 감동과 별개로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에는 뭔가 애틋함이 느껴진다. 박수근의 작품은 실제로 감상하며 질감을 같이 봐야 고유한 화풍이 오롯이 더 전해진다. 물감을 쌓은 재질감이 정말 독특했다.

    소설 나목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 '나무와 두 여인'은 도난 후 다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헐벗은 나무와 고단해 보이는 여인들의 모습 속에 굳센 생명력이 담겨있다.

    그 시절 골목에서 쉽게 마주했을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화가의 시선을 거쳐 작품이 되었다. 세대를 뛰어넘은 정겨움이 느껴졌다.

    소설가 박완서가 박수근이 있었던 PX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했던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던가. 대문호의 첫 작품, '나목'은 같은 시대의 또 다른 거장을 증언하고 있었다.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담은 그림을 보며 그 시절을 살아낸 모두에게 내심 존경을 표했다.

     

    3. 창신동 사람들

    지금의 북한에 터를 잡고 살던 박수근은 한국전쟁 때 서울로 피난을 왔다. 그리고 이내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에 정착했다.  한영수 작가의 '서울 1956~1963' 사진 작품으로 당대의 서울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의 일상은 박수근 작가의 작품과 맞닿아 있다.

    동대문 시장과 인접한 창신동은 서민들의 밀집 주거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평범하고 값진 행복을 누린 박수근은 백내장, 간 손상 등 급격한 건강 악화를 겪게 된다. 그의 짧은 전성기가 남긴 작품과 메시지가 안타까운 감사를 누리게 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

    평범한 판잣집도 그가 그리면 왠지 온기가 느껴진다.

    화폭에 담긴 아내는 지극히 한국적인 피에타로 다가왔다.

    그가 그린 자식들의 그림에선 부성애가 뚝뚝 묻어났다. 나보다 훨씬 어른들이시지만 왠지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짓게 하는 그림들이었다.

    여인, 어린 소녀, 노상, 노인 등 그가 주로 그림에 담은 모티프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그때의 사회상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가늠해 본다. 시대적인 특수상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많은 그림 속에 화가의 다정한 마음이 꾹꾹 눌러 담겨있다.

     

    4. 봄을 기다리는 나목

    추운 겨울 같았던 시절, 사시사철 시린 계절을 견뎌야 하는 그런 시대였기 때문이었을까? 박수근이 그린 나무는 대부분 잎이 없이 앙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재된 생명력 혹은 삶에 대한 의지가 함께 느껴진다. 그가 남긴 문장에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서려있다

     

    하지만 겨울을 껑충 뛰어넘어 봄을 생각하는 내 가슴은 벌써 오월의 태양이 작열합니다."

    독학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끝없이 늘려간 화가는 다양한 기법을 연구했고 그 흔적은 오롯이 작품으로 남았다. 그중 이번 전시의 포스터에도 쓰인 수채화 '고목'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모네가 떠오르는 편안한 색감이 좋았다.

    왠지 우리 동네 뒷산 어귀와 빼닮은 그림도 있었다. 같은 소재를 각기 다른 기법으로 그린 게 신기하다.

    프로타주, 목판화 등으로 그린 많은 작품이 그의 성실함과 열정을 증명했다.

    고양이와 강아지를 그린 그림에서는 나도 모르게 또 아빠 미소를 짓고 말았다. 박수근은 참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견디며 끊임없이 삶을 쌓아나간 성실한 예술가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위대한 그림을 남겼다. 그의 작품엔 봄의 온기가 서려있었다. 시대의 풍랑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감내하며 지켜낸 따뜻한 시선이 크나큰 예술적 성취와 묵직한 감동으로 전해졌다. 그의 작품과 삶처럼 나도 나름의 시련을 견디며 따스함을 잃지 않기를 바라본다. 다 본 뒤, 엽서 몇 장 사고 나오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덕분에 한겨울 속 짧은 봄을 누리고 한밤중의 고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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