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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잘 있어요. 나의 첫 직장...*
    봉사 이야기/NGO 2021. 9. 5. 22:31

    대학을 갓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NGO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던 사회 초년생은 어느새 거의 5년을 채운 대리가 되었다. 입사 초기에 넘치는 열정과 패기 그리고 설익은 사회화로 일터에서 겪은 이런저런 일을 블로그에 남겨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려던 시도는 마음속 생채기와 당시의 풋풋함과 미숙함이 박제된 몇몇 글로 남았다. 그때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누군가가 두렵고 서운했고, 나름의 용기와 노력을 '굳이'라는 테두리로 묶어 험담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 와서 되짚어 보면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쨌든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 나는 평생 머물 것 같던 첫 직장을 우연한 기회에 떠나게 됐다. 쓰고 나서 또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내가 겪었던 시간이 어떤 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나의 첫 시작과 끝을 글로 남긴다. 

     

    입사하기 전에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실무적인 이력과 직무 능력은 한없이 부족하던 내가 갖고 있던 무기는 성장 가능성과 그동안 쌓아온 일관된 경험이었다. 합격은 감히 기대도 하지 않았고 최종 면접을 봤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던 나를 나보다 먼저 알아봐 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첫 출근날부터 행사장에 가 부스를 운영하고 둘째 날엔 많은 분들이 모아주신 동전을 홍보대사이신 연예인과 함께 날랐다. 그 행사를 시작으로 NGO 커뮤니케이션팀의 남자 막내로서 정말 많은 행사에 다양한 역할로 참여할 수 있었다. 때때로 홍보팀이 아니라 대부분의 행사를 주관하는 대외협력팀 신입 직원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많은 곳에 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홍보팀 직원으로서 맡은 첫 메인 업무는 언론홍보였다. 덕분에 다양한 보도자료를 작성하며 내가 기존에 써본 적 없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게 됐다. 글은 목적에 따라 형식도 달라야 한다는 걸 배우며 많이 깨지고 성장했다. 언론사를 대상으로 취재 제안을 하며 방송과 신문의 다른 결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고, 특히 취재 지원을 통해 여러 언론인들을 직접 만나며 동경하던 기자와 PD라는 직업군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사진 찍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내가 찍은 사진이 기관의 매체나 메이저 언론사에 실리는 건 또 다른 경험이었다.

    홍보 업무의 특성상 기관의 다양한 업무를 이해해야 했고 막 첫걸음을 뗀 나에겐 정말 좋은 기회였다. 덕분에 많은 곳을 가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복지와 개발협력에 대한 실무와 개념을 조금이나마 더 익히곤 했다.

    입사하고 1년이 지난 시점부턴 기대보다 자주 해외 사업장에 가게 됐다. 주로 매체에 우리 사업의 전문성이나 기관의 투명성을 알리는 일이 잦았다. 르완다를 시작으로 라오스, 말라위, 베트남, 잠비아 총 5개 국가를 반 년 사이에 다녀왔다. 피로감은 있었지만 일로 해외 현장에 가서 현지 직원 및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어 즐거움과 감사함이 더 컸다.

    물론 주어지는 업무에 비해 부족했던 역량으로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는 날이 잦은 초년생의 나날이기도 했다.

    아직 부족했지만 더 잘 하고 싶은 마음만은 가득해 국토 대장정을 함께 걸으며 질보다 양으로(?) 승부한 언론홍보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루 종일 걷고 밤이면 사진과 홍보 자료를 정리하며 사진부 초청 3번, 지상파 공익 방송 프로그램 취재 진행, 보도자료 배포 3번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스스로 이제 조금 홍보인 태가 난다고 생각했던 기점이었다. 

    글로벌 차원의 캠페인을 처음으로 맡았을 땐 미숙한 점을 보이며 여전히 삐끗하기도 했지만 명절을 반납하다시피 일하며 구른 뒤에 어찌어찌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렇게 NGO 홍보인으로서 나의 조금 먼 미래를 그려갈 즈음에 생각지 못한 팀 이동이 찾아왔다. 정말 많은 일을 짧은 시간 동안 겪은 뒤에 결과적으로 다른 부서에서 방송 모금을 맡게 됐다. 처음에 맡았던 캠페인은 국내 취약계층 아동과 가정의 목소리를 담은 라디오 캠페인이었다. 거의 격주로 전국을 다니며 다양한 취약계층 가정을 만나게 됐다. 첫해엔 각 가정의 어려움과 슬픔이 나에게도 전이되어 한동안 우울했다. 주로 이미 잘 된 사업의 후기나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캠페인을 담당해 왔기에 도움이 필요한 사례는 이야기의 반대편 극으로 다가왔다.

     

    겪은 시간은 참으로 짧았지만 나의 그 얕음으로 빈곤 포르노라는 단어에 맞닿은 고민도 점점 깊어졌다. 다른 문법을 가진 모금 광고에 대한 고민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감사하게도 매체를 통해 그런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결과를 얻었다. 동시에 모금이 위급한 가정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을 보고 들으며 단단해지는 믿음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고민보다는 인터뷰이의 삶이 전한 메시지가 마음에 남았다. 매체에 비친 모습과는 별개로 그들이 인터뷰에 응하는 용기와 삶을 견디는 끈기는 보편적인 기준을 한참 넘어서는 강인함이었다. 

    그렇게 국내 사례를 주로 다루며 때때로 해외 모금 방송 출장 지원을 나가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해외 필르밍이 나의 주업무가 되었다. 홍보 부서에 있을 때도 해외 출장을 가곤 했지만 필르밍은 전혀 다른 업무였다. 가장 취약한 지역에 가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와 가정을 찾는 게 주요한 일이었다. 핸드폰 데이터조차 잘 터지지 않는 두메산골을 쏘다니며 누군가의 아픔을 들추는 일이 마음을 무겁게 하곤 했다. 그렇기에 인터뷰 여부에 대해 인터뷰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고자 애썼고, 아무리 모금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라도 나름의 선을 만들어 지키고자 노력했다. 

    국내외로 다양한 취약 상황을 직접 보고 들으며 때로 슬픔과 무력감을 느꼈다. 다양한 어려움은 실존했고 세상은 생각보다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얄팍하지만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떳떳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에 최선을 다했다.

    일련의 시간을 통해 다양한 삶을 겪으며 세상을 조금이나마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됐다. 편협하고 무지했던 나를 조금이라도 깨우쳐 준 건 현장이었고, 주민이었고, 동료들과 현지 직원들이었다.

    그렇게 마음속 고민을 덜고 최선을 다짐하던 때에 급작스러운 갈림길이 찾아왔다. 어쩌면 성급할지 모를 발걸음을 내딛고 마지막 출근을 마친 순간에도 정든 일터를 떠난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갓 졸업한 신입 직원이 5년 차 사회인이 되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때로 버겁기도 했지만 결국 감사함이 더 크다. 함께 견뎌낸 시절이 앞길에 살아갈 힘이 될 거라 믿는다. 나는 정말로 행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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