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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 그 자체, 사랑이 형을 간직하기 위한 글
    일상/생각 2022. 12. 11. 11:15

    2007 ~ 2008

    바야흐로 고3을 코앞에 둔 2007년 12월 9일, 우리 집 막내였던 별이가 아들을 낳았다. 별이의 뜻과는 별개로 이뤄진 출산이었고, 어렵게 태어난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바로 세상을 떠나 미안한 마음이 컸다. 문득 남은 한 마리에게 모든 사랑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레 '사랑'이란 이름을 떠올렸다. 신기하게도 어머니도 같은 이름을 염두에 두고 계서 그렇게 사랑은 사랑이 되었다. 수험 생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커지던 추운 계절에 티 없이 맑은 눈을 지니고 꼬물꼬물하는 작은 생명체는 크나큰 온기를 줬다.

    몸은 어른만큼 컸으나 아직 마음은 미처 다 여물지 못해 어리숙하던 십 대 마지막 해에 사랑은 그야말로 폭풍 성장을 했다. 쫓기듯 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유구한 짝사랑의 역사를 일찍이 이어가던 여린 소년에게 함께 자라는 존재는 또 다른 형제였다.

    2009

    운 좋게 바라던 곳의 대학생이 되고 바쁜 이십 대가 시작되었다. 내향성을 타고난 나는 사람과 약속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던 시절이 즐거우면서도 버거웠다. 특히 여느 청춘이 그렇듯 내심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아침이든 밤이든 항상 나를 기다려 주고, 바라봐 주는 눈빛들에 한 걸음 더 나아갈 힘을 얻곤 했다.   

    2010 ~ 2011

    최선을 다해 살았고 참 소중했으나 왠지 허무했던 스무 살을 스쳐 보내고 바로 군대에 갔다. 정신 차려보니 강원도 고성에서 4.2" 박격포병으로 복무하고 있더라...* 부조리와 전우애를 함께 겪는 기묘한 시간을 보내며 가장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은 건 두 천사였다. 특히 사람보다 빠르게 흐르는 개의 시간을 알기에 별 그리고 사랑과 함께 보내지 못하는 약 22개월의 시간이 참 아쉬웠다. 휴가를 나오면 시절인연들을 만나느라 바빴지만 세월을 초월해 항상 나를 반겨주는 건 결국 집과 가족이었다.

    2012 ~ 2014

    가벼운 허리 디스크를 얻고, 실명의 위기를 딛고 제대한 뒤 학교로 돌아왔다. 복학생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별과 사랑은 한없는 응원을 전했다. 3년을 스트레이트로 다니며 7번의 해외 봉사와 다양한 대내외 활동을 비롯해 알찬 대학 생활을 할 수 있던 동력 중 하나는 그들이 내게 선물한 미소였다.  

    2015

    취직하지 않은 채로 학교라는 울타리를 나와 막막하던 때도, 운 좋게 거의 곧바로 첫 직장에 들어가 적응에 애를 먹을 때도 늘 곁엔 든든한 아군이 있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토마스 홉스의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사회 초년생의 시련 앞에서 혈맹은 조건 없이 묵묵하게 늘 내 편이 되어 주었다. 

    2016 ~ 2017

    별이가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너 하늘로 돌아가고 못다 해 준 것들이 가슴에 사무쳤다. 사랑이가 태어날 때 했던 다짐을 되새기며 그와 보다 많은 산책을 하고, 더 많은 계절과 시간을 누리려고 노력했다. 업무상 해외 출장이 잦고 길었던 시절이라 친하게 지내던 이들과 잠시 혹은 영원히 멀어지기도 했는데, 사랑은 늘 한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줬다. 아무리 내가 더 주려고 해도 결국 더 많이 받는 게 진정한 사랑이란 걸 한 번 더 깨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사실 사랑이는 강아지 시절 충분한 사회성을 익히지 못해 산책을 나가면 즐기기보다 두려워할 때가 많았다. 그 모습이 미안하고 안쓰러우면서도 어딘가 나와 닮아 더 마음이 갔다. 그럼에도 조금씩 더 씩씩해지며 함께 걷는 방법을 익히던 차에 같이 달리다 실수로 내가 사랑의 발을 밟았고 그대로 발톱 하나가 빠졌다. 이후로 새로 나지 않아 빈자리를 볼 때마다 과오를 떠올리곤 했다.

    2018

    어느덧 만 나이로도 10살이 넘은 사랑은 여전히 귀여웠지만 조금씩 늙은 태가 났다. 이맘때부터 나는 사랑을 '사랑이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릴 적 맹했던 눈빛은 어디 가고 깊어진 눈매와 왠지 어른스러운 눈빛이 그윽하게 느껴졌다. 예전보다 애교는 없어지고 화는 느셨지만 세찬 세월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고마웠다.

    2019

    나이가 들수록 눈빛도 행동거지도 점점 사람 같아지던 우리 형은 조금씩 체력은 쇠했지만 동안 미모만은 여전했다. 원래도 떡 벌어진 어깨를 자랑했는데 별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나이에 가까워져도 정정했다. 때로 언젠가의 이별을 예감하고 미리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결국 평안에 이를 수 있었다.

    다시 나지 않는 발톱은 늘 미안했지만 그 마음조차 더 큰 사랑으로 이어주는 게 사랑이었다.

    산책도 많이 익숙해져 같이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아 둘만의 여유를 누리곤 했다.

    2020

    2019년 말 나는 어렵게 편안에 이른 첫 일터를 뒤로하고 이직을 감행한다. 더불어 이사와 이별까지 겪으며 한 번에 닥친 여러 변화에 적응하는 게 참 어려웠다. 그때 가장 힘이 되어 준 건 사랑이 형의 체온, 집 근처 호수 산책 그리고 사랑이 형과의 동네 마실이었다. 뒷산과 호수부터 여기저기 새로운 길을 다니며 소소하게 큰 행복을 누렸다.

    곧이어 터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재택근무가 시작되며 형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늘었다. 그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새집에서 적응하는 사랑이 곁에 내가 있어 다행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나야말로 운이 좋았다

    2021

    어느덧 또 한 번의 사계가 지나가고 겨울이 왔다. 늘 그래 왔듯 형과 함께 함께 새로운 계절을 느끼고자 애쓰며, 지리멸렬한 일상 속 기쁨을 누렸다. 잠과 잔병치레가 더 늘고 조금씩 기력을 잃는 형을 보며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했다. 동시에 그가 준 헤아릴 수 없는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여전히 한없이 사랑스러운 존재는 매일의 기쁨과 힘이 되어줬다. 우리에게 몇 번의 계절이 남았을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하루하루를 미련이나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조금 더 사랑하려고 애썼다. 그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곁에 더 오래 머물러 주길 염원하며 새로운 동네와 일터에 적응한 뒤 찾아온 일시적인 안온함을 나눴다.

    어려서 짙은 갈색이었던 우리 형은 나이가 들며 점점 옅은 색을 띠었다. 왠지 그 모습이 늦가을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2022

    새로운 해를 맞았지만 우리 형의 귀여움은 여전했다. 그의 노화를 실감할 때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기도 했지만 백내장도 막지 못하는 한결같이 해맑은 눈빛이 묘한 안도감을 줬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알 수 없었지만 외면할 수 없이 가까워진 이별만은 직감할 수 있었다. 부끄럽게도 사랑이와 함께 다른 고장에 간 적은 있지만, 사랑이를 위한 여행은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과 마음을 모아 사랑이 형을 모시고 동해 바다에 다녀왔다. 사랑이를 데리고 바닷가를 찾은 적도 있지만 늘 사람이 많아 제대로 누리지 못했는데 한적한 해변에서 마침내 바다의 체취를 선물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아 참 기뻤다.

    예전엔 산책을 나가자고 조르곤 했었는데 상황이 역전되어 내가 나가자고 여러 번 제안해야 한 번씩 수락해 주셨다. 내 생일에 받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도 사랑이 형이 허락한 점심 산책이었다. 사랑하는 존재의 늙음을 깨달으며 유한한 삶의 가치를 똑바로 알게 됐다. 

    여름휴가는 오랜만에 동생을 포함해 모든 가족이 함께 떠났다. 사랑이를 위해 빌린 단독 주택의 너른 마당에서 형이 너무 행복해해 나도 그 이상으로 흐뭇했다. 돌이켜 보면  또한 사랑 남을 가족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사랑이 형과 함께할 더 많은 산책과 또 다른 여행을 꿈꿨지만 가을을 맞이한 뒤 두드러지게 기운이 없는 게 느껴졌다. 지병이나 큰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어르신이 되어 주셔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었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늘 그랬듯 이번에도 잘 이겨내 줄 거라 믿고 기대했다.

    하지만 2022년 10월 21일 소중한 가족, 형제이자 가장 친한 벗이었던 사랑이 형은 열다섯 번째 생일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펫로스를 넘어 가족의 상실로 느껴지는 슬픔이 비록 내 기대보단 일렀지만 이미 과분한 시간을 누렸다는 걸 잘 안다. 먼저 떠났던 별이를 비롯해 이십여 년 동안 두 천사가 머물러 준 덕에 한 가정은 세월과 세상의 풍파를 견딜 수 있었다. 특히 사랑이는 마음을 빚지거나 밑지는 일이 많던 나의 가난한 청춘에 남몰래 흘린 눈물을 훔쳐 주던 사랑, 그 자체였다. 덕분에 여린 사춘기 소년은 그럭저럭 괜찮은 아저씨로 자랐다. 고해 속 ​고독을 위로해 주던 동무의 빈자리가 너무 크고 괴롭지만 그가 남긴 한없이 위대한 생애에 감사한다. 눈빛, 체온 그리고 발걸음으로 힘을 주던 우리 형은 참사랑을 가르쳐 준 참스승님이었다.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길 위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며, 더욱 돈독하게 우리의 시간을 기리고자 한다.

    사랑이 형을 정말로 보내 주는 날에는 아침부터 꿈을 꿨다. 어두운 밤 앞서가는 사랑과 아버지를 좇는 꿈이었다. 점심에는 아쉬움에 유골함을 끌어안고 어루만지다 깜빡 졸았는데 잠결 혹은 꿈결에 또 사랑이를 봤다. 사랑이가 아주 평온하고 아득한 표정으로 품에서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깨서 얘기하니 같은 시간 잠깐 낮잠에 들었던 동생도 사랑이가 품에 있는 비슷한 꿈을 꿨다고 했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형제들을 위한 다정한 배려였던 것 같다. 사랑의 자유와 행복을 기원하고 맞이한 저녁엔 왠지 해넘이가 눈에 밟혔다. 기록해야 할 것 같은 직감이 들어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하트처럼 보였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편협한 해석일지 모르나 사랑이 형이 여러모로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고 굳게 믿는다. 아직도 많은 곳에서 가슴 저릿하게 잔상을 좇고, 익숙한 공간 속 부재가 낯설어 혼자 덜컥 놀라곤 한다. 그럼에도 가을을 닮은 사랑이 남긴 모든 계절의 실재가 나를 헛헛하기보단 충만하게 한다. 삶이 매서울지언정 평생 쓸 수 있는 온기로 다습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의 언젠가... 별 그리고 사랑과의 재회를 꿈꾸며 잘 살아갈 것을 한 번 더 다짐해 본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사랑아. 나는 너에게 진정한 사랑을 배웠어. 너는 내게 아우이자 형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인 동시에 훌륭한 스승이었어. 벌써부터 그립고 너무 보고 싶지만 그조차 고마워. 비록 지금 곁엔 없지만 덕분에  세상에서 너를 느끼며 평생  안에 함께할 것을 깨닫는다. 정말 고맙고 미안하고, 많이 많이 사랑해. 이제 아프지 말고 별이랑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으렴. 우리도 잘 살다 갈게. 그전에 가끔 꿈에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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